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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비움의 건축 – 공간을 설계하지 않고 남기는 철학

by 몌힌5124 2025. 4. 9.

동양과 서양이 비움을 대하는 서로 다른 방식에 대하여

공간을 만드는것이 아닌, ‘남기는방식

건축은 공간을 채우는 예술일까요, 아니면 비우는 기술일까요?

우리는 흔히 건축을 무언가를 세우고, 채우는 일로 생각합니다. 이는 서양의 건축 전통에서 유래한 시각으로, 질서와 기능, 장식과 구조를 통해 공간을 완성하려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그러나 한국을 포함한 동양의 전통 건축에서는 비움이라는 개념이 오히려 중심이 됩니다.

 

비운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을 덜 설계하거나 미완성으로 남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용자와 자연, 감정과 해석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철학적 태도입니다. 동양의 건축은 공간 그 자체보다, 공간 사이의 관계와 흐름, 여백이 주는 감정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 글에서는 비움이라는 개념이 동양 건축에서 어떻게 공간의 미학으로 자리 잡았는지, 그리고 서양 건축에서의 절제된 비움개념과 어떻게 대비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또한 오늘날의 현대 건축에서 이 철학이 어떻게 계승되고 확장되고 있는지도 함께 조명하고자 합니다.

 

여백의 미학 동서양의 비움은 무엇이 다른가?

동양 예술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여백(餘白)입니다. 그림에서 여백은 단순한 빈칸이 아니라, 시선의 흐름을 유도하고 상상력을 확장시키는 공간입니다. 마찬가지로 건축에서도 여백은 공간의 숨결을 만들고, 사용자가 해석할 수 있는 여유를 부여합니다.

 

한국 전통 건축에서는 건물과 마당 사이, 처마와 하늘 사이, 담장과 담장 사이에 비어 있는공간이 존재합니다. 이 공간은 자연광, 바람, 계절의 변화와 만나 살아 있는 감각의 장소가 됩니다. 예컨대 한옥의 마당과 툇마루, 일본 료안지(龍安寺)의 돌 정원은 그 자체로 비어 있지만 감정이 머무는 여백이자 사용자의 해석이 개입하는 열린 구조입니다.

 

반면 서양의 비움 개념, 특히 20세기 중후반 미니멀리즘 건축에서의 비움은 성격이 다릅니다. “Less is more”라는 말로 대표되는 이 흐름은 불필요한 장식을 제거하고, 본질적인 요소만 남겨 공간을 정제하는 방식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이나 존 포슨(John Pawson)의 주거 건축은 기하학적 선과 면, 반복된 재료를 통해 질서와 집중을 설계합니다.

 

동양의 비움이 여지를 남기는 미학이라면, 서양의 비움은 덜어냄으로써 본질에 집중하는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움의 건축 – 공간을 설계하지 않고 남기는 철학
일본 료안지의 돌정원

미완성의 미학 의도적으로 남기는 불완전함

동양 건축에서는 완벽하게 마감되지 않은 요소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거칠게 남긴 나무기둥, 비대칭의 마감, 일부러 어긋난 배치 등은 전통적으로 완성된 상태보다,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를 미학으로 보는 시각에서 비롯됩니다. 일본의 와비사비(Wabi-sabi) 미학, 한국의 담백함을 중시하는 전통 감각, 불교의 무상(無常) 사상 등이 이러한 관점을 형성해 왔습니다..

 

이러한 불완전함은 건축에서도 그대로 반영됩니다. 사용자의 감정과 시간이 개입될 수 있는 열린 구조는 공간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여지를 가집니다. 미완성은 결핍이 아니라, 해석 가능성과 생명력을 품은 비움인 것입니다.

 

반면, 서양 건축은 전통적으로 완결된 형태절제된 질서에 미학적 가치를 두는 경향이 강합니다.

 

고전주의 건축에서는 대칭과 비례, 완전한 구성미가 이상적인 건축의 기준이 되었고, 근현대에 이르러 미니멀리즘 건축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이어졌습니다.

 

20세기 건축가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는 "Less is more"라는 말로 대표되는 철학을 통해,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고 절제된 형태를 통해 공간을 구성했습니다.

 

여기에서의 비움은 의도적인 미완성이라기보다는, 절제된 미의식에 기반한 정돈된 완결성에 가깝습니다.

 

해석의 가능성 정해지지 않은 공간의 힘

동양 건축에서 비워진 공간은 특정 기능을 규정짓지 않음으로써, 사용자의 감정과 해석에 따라 변화 가능한 유연성을 가집니다.

 

한옥의 마루, 툇마루, 마당은 언제든지 쉼터가 되고, 대화의 장소가 되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며, 명상의 공간으로도 전환됩니다.

 

이처럼 비움은 기능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기능을 다층적으로 열어두는 방식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현대 서양 건축에서도 해석 가능한 공간을 지향하는 흐름이 나타납니다.

 

스위스 건축가 페터 줌터(Peter Zumthor)는 건축을 통해 감각의 흐름과 분위기를 경험하게 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브레겐츠 미술관은 기능을 최소화한 채, 빛과 재료, 침묵을 통해 방문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공간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합니다.

 

서양의 이러한 비움은, 동양처럼 의도된 여백이라기보다는, 감각을 위한 '프레임'으로써 기능합니다.

이 역시 정해지지 않은 공간이 주는 해석의 힘을 현대적으로 구현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 건축에서의 비움 감성 중심 설계의 재등장

최근 전 세계적으로 건축에서의 비움은 새롭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감성, 정서, 체험 중심의 설계가 주목받으며, 기능과 구조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난 공간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동양 건축은 사용자의 감정과 자연의 흐름을 고려하여, 의도적으로 남겨진 여백과 유동성 있는 구조를 통해 감성 중심의 공간을 만들어왔습니다.

 

현대 건축가들 또한 이러한 가치를 현대적 언어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노르웨이의 건축 그룹 스노헤타(Snøhetta)는 기능성과 상징성을 넘어서, 공간을 통해 사람의 감정을 터치하려는 시도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오슬로 오페라하우스는 경사로 설계된 지붕 위를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열어두고, 주변 경관과 조화된 감각적 경험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기능에 얽매이지 않고, 사용자 중심의 해석 가능성을 비움으로 구현하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움은 단순한 없음이 아니라, 감각과 해석을 위한 열림으로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전통의 미학은 현대의 감성적 공간 전략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설계하지 않은 공간이 가장 풍부한 공간이다

공간을 채우지 않는다는 것은, 그 안에 사용자의 감정과 해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남긴다는 의미입니다.

 

한국 건축을 포함한 동양의 전통은 여백과 비움, 미완성의 미학을 통해 공간을 완성하지 않고 열어두었습니다. 이는 설계자의 개입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 시간과 감정이 함께 공간을 완성하게 하는 지혜였습니다.

 

오늘날의 건축에서도 이 철학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비움은 단순함이 아니라 여유이고, 효율이 아니라 감성이며, 규정이 아니라 가능성입니다. 설계하지 않은 공간이 때로는 가장 깊이 있는 공간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