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타미 준의 건축은 마음을 울리는가?
감성으로 지은 건축, 공간이 주는 울림건축이 단순한 공간 구성의 기술을 넘어, 인간의 감정과 내면을 담아내는 예술이라면 "이타미 준(伊丹潤, Itami Jun)"은 그 진정한 의미를 구현한 건축가라 할 수 있습니다. 본명 "유동룡(庾東龍)"으로, 재일 한국인 2세였던 그는 일본에서 활동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말년에는 한국 제주에서 자연과 정서를 담은 건축을 실현하며 한국적 감성을 건축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시각적 장식보다는 공간 속 여백과 재료의 감촉, 빛의 흐름 같은 감각 요소를 중시했습니다. 그의 건축은 빠르게 지나가는 일상에서 한걸음 멈춰 서게 하고, 조용히 공간과 마주하게 하며, 감정의 결을 따라 흐르게 만듭니다.
이 글에서는 이타미 준의 건축 철학과 대표작, 그리고 그가 어떻게 한국의 자연과 정서를 공간에 녹여냈는지를 살펴보며, 왜 그의 건축이 마음 깊이 남는 감성적 경험으로 기억되는지를 조명합니다.
건축 철학 – 여백과 자연, 감성의 언어
이타미 준의 건축은 시각적 인상보다는 공간이 주는 감각적 체험과 감정적 울림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는 동서양의 건축 사상, 특히 동양 철학의 '여백의 미'와 '무위자연' 사상을 깊이 수용하며, 공간을 감성의 매개체로 확장했습니다.
- 여백의 극대화: 그는 여백을 단순한 공백이 아닌,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으로 해석했습니다. 장식을 배제한 정적인 구성은 사고와 사색의 여지를 열어줍니다.
- 계절과 시간의 흐름을 반영한 공간: 이타미 준의 건축은 계절과 하루의 변화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자연의 흐름을 공간에 반영해, 사용자와 환경 사이의 감각적 교감을 이끌어냅니다.
- 감정을 이끄는 대화의 건축: 그는 공간이 사용자에게 말을 거는 구조를 추구했습니다. 빛, 소리, 재료의 질감 등 감각 요소를 통해 건축이 감정을 일깨우는 방식으로 구성됩니다.
그의 건축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것"이라는 철학에 기초하며, 단순하고 절제된 구조 안에 깊은 정서적 서사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건축은 공기의 흐름을 만드는 일"이라고 말하며, 공간 속 공기와 소리, 침묵까지도 설계 요소로 간주했습니다. 바람, 물방울, 발소리처럼 미세한 소리들은 공간과 감정을 연결하는 감성적 장치가 됩니다.
제주의 건축 – 풍경이 되는 건축
이타미 준의 감성 건축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은 바로 제주도입니다. 그는 제주에서 물, 바람, 돌을 주제로 한 건축 3부작을 설계하며, 지역성과 한국적 미학, 자연 철학을 집약한 공간을 구현했습니다.
- 포도호텔 (2001)
한라산 중턱에 위치한 이 건축은 제주 오름과 초가집에서 영감을 받은 곡선형 지붕과 노출 콘크리트의 조화를 특징으로 합니다. 외관은 풍경과 어우러지고, 내부는 어두운 톤과 여백을 통해 명상적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객실 창은 좁지만 각각 다른 방향으로 배치되어, 창밖 풍경이 하나의 정적인 '풍경화'처럼 느껴지도록 구성됩니다.
- 방주교회 (2009)
제주 안덕면 상천리에 위치한 이 교회는 성경 속 노아의 방주에서 모티브를 따와 설계된 공간입니다. 노출 콘크리트로 된 장방형 매스가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형상으로, 단단함과 부유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구조적 긴장감을 줍니다. 내부는 최소한의 빛과 재료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간의 침묵과 자연의 울림을 통해 종교적 감정을 이끌어냅니다.
방주교회는 단순한 종교 시설을 넘어, 명상과 사색을 위한 공간,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 교감하는 장소로 기능하며, 이타미 준의 감성 건축 철학이 극적으로 구현된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 수풍석 뮤지엄 (2009)
제주 서귀포에 위치한 이 건축은 물의 정원, 바람의 정원, 돌의 정원이라는 세 개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공간은 감각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자연을 표현합니다.
- 물의 정원: 잔잔한 수면 위로 하늘과 빛이 반사되어 고요함을 전함
- 바람의 정원: 공간을 통과하는 빛과 소리의 흐름이 사용자에게 바람을 체감하게 함
- 돌의 정원: 제주 화산암의 거친 감촉을 통해 대지의 원형성과 생명력을 전달
이들 공간은 건축이 단순히 보는 대상이 아니라, 느끼고 머무는 경험이 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인상이 달라지는 유기적 구조는, 감정과 공간이 상호작용하는 감성 건축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정체성과 건축 – 경계에 선 감성의 언어
이타미 준은 재일한국인 2세로서의 정체성을 건축에 녹여낸 인물입니다. 그는 일본에서 자랐지만, 자신의 뿌리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늘 의식했고, 생애 후반에는 한국적 정서와 자연을 표현하는 건축에 전념했습니다.
그의 건축은 서구적 구조 논리와 동양적 감성의 균형 위에 서 있습니다. 일본 미니멀리즘의 절제미와 한국 전통의 여백미가 공존하며, 문화 간 경계에 선 자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섬세한 감수성이 드러납니다.
이타미 준은 자신의 작업실을 제주에 두고, 그곳에서 조용히 사유하며 작업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단지 공간의 결과물이 아니라, 한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과 삶을 이해한 흔적입니다. 그래서 그의 건축은 설명보다 경험과 체험으로 남는 건축, 감정의 기억으로 오래도록 머무는 건축이 됩니다.
건축, 감정을 짓는 예술
이타미 준의 건축은 조용히 감정을 일깨우고, 천천히 머무르게 하며, 사용자의 내면과 대화를 나누는 공간을 지향합니다. 속도 중심의 도시 건축과는 달리, 그의 건축은 멈춤과 사색, 감성의 흐름을 중시하는 감성적 건축 언어입니다.
그는 한국의 자연과 정서를 현대 건축 언어로 풀어내며, 건축이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사유하게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미학의 성취가 아닌, 건축이 인간의 감정을 담아내는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한 작업입니다.
이타미 준의 건축은 오늘날에도 감성 중심의 건축이 필요한 이유를 말없이 전합니다. 우리가 그의 공간에서 받는 위로는, 결국 삶의 속도에 균열을 내고 감정을 회복하게 하는 힘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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